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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컬러의 방-4

by 책 읽는 바오밥 나무 2023. 1. 30.

2023.01.16 - [자기계발서] - 굿모닝 해빗, HIGH FIVE HABIT-4

 

 

<분홍의 방>

분홍색은 행성 간의 먼지 구름, 그리고 이온화된 기체로 구성된 성운이 띠는 주요 색깔 중 하나다. 천체 물리학자 프랭크 서머스는 이에 관해  "우주에서 가장 풍부한 원소는 수소다. 수소는 별의 열기로 인해 수천 도로 데워지면 분홍색처럼 보이는 부드러운 붉은빛을 발한다. 어떤 성운은 푸른색을 띠는데, 이는 짧은 파장(파란빛)이 긴 파장(붉은빛) 보다 더 쉽게 반사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까운 별들의 빛을 반사하는 성운은 푸른색으로 보인다."라고 설명한다. 그는 이렇게 덧붙인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우주의 색은 별이 형성되는 지역에서 내뿜는 수소 알파의 분홍색이다. 수천 도로 빛나는 이 가스는 새로 태어난 별 무리를 둘러싼 성운의 보호막이다. 별들의 육아실이 뿜는 분홍색 빛은 봄철의 초록색처럼 생명력을 나타내는 온기의 색이다." 

 벚꽃은 일본의 비공식 국화로 일부는 흰색, 일부는 크림슨에 가깝지만, 600여 종 대부분이 분홍색이다. 일본 문학에서 '사쿠라'를 최초로 언급한 책은 720년에 완성된 '일본서기'로, 여기서 이추 천황의 사케 잔에 꽃잎이 떨어졌다는 문장이 등장한다. 일본 문학과 노래에서 벚꽃은 아름다움과 부활의 상징으로 숭배되지만, 단 몇 주 동안만 피는 꽃이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인생의 덧없음을 나타내기도 한다. 작자 미상인 일본의 유명 하이쿠는 이렇게 읊는다. '벚꽃이 이토록 기쁨을 주는 건, 흔적도 없이 흩어지는 까닭이니/ 이 세상에서 오래 머무는 건 추함을 의미한다.' 일부 학자들은 오래전부터 떨어진 벚꽃이 주군을 섬기다 죽은 젊은 사무라이를 상징했다 하고, 또 다른 학자들은 이러한 연관성이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정부에 의해 소급해서 과장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벚꽃과 사무라이의 연결 고리를 밝히는 아주 오래된 증거들이 있는데, 그 일례가 '최고의 꽃은 벚꽃이고, 최고의 남자는 전사다'라는 중세 속담이다. 일부 사무라이들은 벚꽃 나무 아래서 할복자살하곤 했는데, 이는 가장 아름다운 순간의 죽음, 즉 이상적인 죽음으로 여겨졌다. 학자이자 시인이자 고위 공무원이었던 마쓰다이라 사다노부 등의 일부 관리들은 오직 일본에서만 핀다는 또 다른 이유로 벚꽃을 귀하게 여겼다. 사다노부는 1818년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벚꽃이 일본에서만 피는 독특한 꽃이라 믿으면서도 어쩌면 중국에도 존재할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열심히 조사해 보았지만 벚꽃을 묘사한 중국 그림도, 벚꽃을 언급한 중국 시도 발견하지 못했다." 벚꽃에 대한 사다노부의 민족주의적 해석은 '만발한 벚꽃처럼 흩날릴 준비가 된' 전사를 기리는 군가 <청년일본가>처럼 이후 국체(주로 일제시대 천황 중심 국가체제를 의미하는 말로 쓰인다.)를 장려하는 국가적 프로파간다에 영향을 미쳤다. 1930년, 일본 군대 내 극우 군국주의 모임 사쿠라카이(벚꽃회)가 히로히토 천황 치하에 전체주의 정권 수립을 모의했다. 구테타에 두 번 실패하면서 1931년 공식 해산되었지만, 사쿠라카이의 영향력은 죽지 않았다. 사쿠라카이를 이끌던 하시모토 긴고로 중령은 제 2차 세계대전 동안 젊은이들에게 사상을 주입하는 일을 맡았다. 이안 부루마가 '일본의 거울'에서 말한 것처럼, 벚꽃 숭배는 부분적으로 '죽음의 숭배'였다. 이러한 숭배를 가장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가미카제로, 수많은 가미카제 조종사가 최초이자 최후의 임무를 수행하기 전 자신의 군복에 잔가지를 달거나 비행기 측면에 벚꽃을 그렸다. 가미카제는 '신성한 바람'이란 뜻으로, 1281년 몽골 함대를 퇴각하게 만든 태풍을 의미한다. 부루마에 따르면 이 비운의 조종사들이 남긴 편지와 시에서도 벚꽃에 대한 언급을 찾을 수 있다. 22세의 한 조종사는 임무를 맡기 전 이런 글을 남겼다.

 

이왕 떨어져야만 한다면

봄날의 벚꽃처럼

그토록 순수하고 찬란하게.

 

순수하고 찬란하게 남겠다는 것은 2600파운드의 다이너마이트를 앞부분에 탑재한 비행기에 올라탄 뒤, 탈출 버튼도 없는 기체에 몸을 묶고 시속 600마일의 속도로 날아가 미국 군함에 충돌하는 것을 의미했다. 1944년 10월 레이테만 전투에서 첫 공격을 했을 때부터 전쟁이 끝날 때까지 가미카제는 최소 34척의 함선을 침몰시켰고 수많은 선박에 피해를 줬다. 1945년 오키나와 전투에서는 4800명의 미국인이 가미카제 공격으로 사망했는데, 이는 진주만 전투에서 발생한 사망자의 거의 두배에 달하는 수치다.

 

 컬러의 방은 색깔별로 관련된 역사, 사회, 브랜드등등의 이야기들을 풀어주는 재미있는 책이다. 색깔별로 이야기를 풀어내기에 똑같은 얘기라도 흥미진진하고 무거운 얘기도 한층 가볍게 다가와 읽기 편하다. 특히 분홍하면 뺴놓을  수 없는 벚꽃관련된 얘기 갈색과 관련된 미술 이야기등이 흥미롭게 다가온다.

 

 

<갈색의 방>

카라바조의 그림들은 갈색에 흠뻑 젖은 어둠 한가운데 밝게 빛나는 인물을 배치함으로써, 인상적이고 혁신적으로 색상 대비를 극대화시켰다. 그의 명암 대비 기술은 그의 동료 화가들, 특히 이탈리아에서 작업한 경험이 있는 프랑스 화가들로부터 장인의 기술을 배운 렘브란트 판레인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렘브란트의 후기 작품에서 갈색은 지배적인 색이 되었다. 필립 볼은'브라이트 어스'에서 "1650년대 말, 렘브란트는 주로 여섯 개 정도의 색소를 사용했는데 거의 칙칙한 흙색이었다"라고 말한다. 그의 그림 전반에 배어 있는 어둠을 모든 이가 좋아한 건 아니다. 이를테면 렘브란트와 동시대에 활동한 화가이자 미술 이론가 제라르 드 래레스는 '렘브란트는 익어서 썩어버릴 정도의 원숙함을 추구한다'며 비판했다. 렘브란트의 경제 사정이 좋지 못해 팔레트 색상에 제약이 생겼을 가능성도 있다. 렘브란트는 1656년 파산선고를 받은 후 거의 극빈자가 됐고, 흙색은 다른 색소보다 저렴했다. 하지만 렘브란트의 그림이 어두운 데는 분명 예술적 의미도 존재한다. 그의 후기 작품은 색채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어두웠는데, 이는 궁핍하게 살았던 것도 모자라 1668년 27세의 나이로 요절한 아들 티투스의 죽음을 비통해하던 말년의 고통을 반영한 것이다. 그는 아들이 죽고 1년 뒤 사망했지만, 그의 죽음은 암스테르담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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